-
<연려실기술> 제2권 태조조고사본말 - 태조조의 문형(文衡) 권근학술.출판 2020. 11. 4. 06:04
연려실기술 제2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태조조의 문형(文衡)

권근 초상화 권근(權近)홍섬(洪暹)의 문형을 기록한 시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문형 선생안(文衡先生安)에도 빠졌다. ○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권근은, 자는 가원(可遠)이고, 뒤에 사숙(思叔)으로 고쳤다. 처음 이름은 진(晉)이며, 호는 양촌(陽村)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정승 권부(權溥)의 손자이고, 정승 권희(權僖)의 아들이다. 공민왕 기유년(136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사에까지 이르렀고, 조선에서는 찬성사 예문관 대제학 좌명공신(贊成事藝文館大提學佐命功臣)길창군(吉昌君)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태종 기축년(1409)에 졸하였다.
○ 공의 얼굴빛이 검어서 사람들이 까마귀라고 지목하였기 때문에 소오자(小烏子)라고 자칭하였다.
○ 공민왕이 전부터 나이가 너무 적은 자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던 차에, 공이 열여덟 살 소년으로 병과(丙科)에 합격하므로,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저렇듯 나이가 적은 자도 과거에 급제하였느냐." 하니, 공거(貢擧 고시(考試))를 맡은 이색(李穡)이 대답하기를, "그 그릇이 장차 크게 쓰여질 사람이니 하찮게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자, 왕의 마음이 풀어졌다. 〈행장〉
○ 기사년(1389) 여름에 공이 표문을 가지고 명 나라에 갔다가 가을에 명나라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며 좌상인 이림(李琳)이 도당(都堂)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자문을 주었다. 그때 태조가 우상으로 있었는데, 누가 전하기를 "예부의 자문이 다른 성(왕씨가 아닌 성)으로 임금을 삼은 것은 부당하다고 문책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이 태조의 집으로 오자, 태조가 묻기를, "이번에 온 자문은 무슨 일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미 도당에 드렸으니 그 일을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정직하게 여겼다. 모든 대신이 예부의 자문에 의하여 위주(僞主)를 폐하고, 왕족인 정창군(定昌君)을 임금으로 모셨다. 대사헌은 공이 사사로이 자문을 열어 보고 먼저 위주의 장인에게 보였다고 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죄가 없음을 변명해주어 면하였다.
○ 공양왕 2년 여름에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에 공과 이색 등 십여 사람이 청주 옥에 잡혀 있었는데, 별안간 하늘에서 큰 비가 쏟아져 수재가 생겨 모두 방송되었다. 가을에 또 익주(益州)로 귀양가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고, 3년 봄에 충주 양촌(忠州陽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니, 《예기》를 교정하고, 오경(五經)의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변론하여 제목을 《천견록(淺見錄)》이라 하였다.
○ 고려 말에 사건에 연루되어 영해(寧海)로 귀양갔다가 풀려 충주로 돌아왔는데, 태조 2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에 갈 때에 공을 행재소(行在所)로 불러서 정릉(定陵) 비문을 지으라 명하고, 예문관 제학으로 제수한 뒤에 어가(御駕)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 그때 공이 충주에서 행재소로 왔다. 어느날 태조가 은 소반 하나를 내 놓고, 따라온 재상들에게 활을 쏘아 은소반 내기를 하게 하였는데 무신들도 모두 맞추지 못한 것을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던 공이 단번에 맞추어 은 소반을 얻었다. 《필원잡기》
○ 공은 고려 말의 이름난 대부이다. 진실로 당시 유방(流放)된 그대로 있었으면 문장과 명망이 어찌 목은(牧隱) 같은 여러 공들보다 못하겠는가. 그런데 계룡산 송(雞龍山頌) 한 편을 지어, 졸지에 새 나라의 사랑 받는 신하가 되었으니, 가엾도다. 이미 항복한 뒤에 지위는 삼사(三司)에 지나지 않고, 60도 못살았으니, 소득도 적었다. 오직 자손 대대로 고관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번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양촌, 양촌'하여 덕행이 있는 것 같이 여기니, 심하다, 그 명성을 도적질함이여. 《상촌휘언(象村彙言)》
○ 태조가 개국한 뒤에도 공이 굽히지 않으니, 태조가 달래어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공의 아버지 권희가 공의 아들 권규(權跬)를 길렀는데, 아이가 장성했는데도 아직 혼인을 안 하고 있자 태조가 공주 태종의 딸 경안공주와 혼인을 시켰다. 어느날 태조가 권희에게 이르기를, "권근이 나를 잊었는가. 전조(前朝)를 위하여 수절하는 것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대의 나이가 이미 많은데 권근이 와서 보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충성하는 것만 생각하고 효도하는 것은 성의가 부족한가." 하니, 권희가 대답하기를, "권근이 어찌 늙은 아비를 잊어버리겠습니까. 몸에 병이 많아 일어날 수가 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근래에 그의 편지를 보니, 오래지 않아 신을 보러온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매우 기뻐하며 이르기를, "권근은 어느날 길을 떠나고, 어느날 서울에 들어오느냐." 하니, 권희가 꾸며서 대답을 하고, 곧 사람을 보내어 오기를 재촉하였다.
공이 할 수 없이 충주에서 나서자 감사가 떠났다고 장계로 아뢰니, 곳곳에 장막을 치고 음식을 차려놓고서 기다렸다. 공이 차마 서울로 직접 오지를 못하고 빙빙 돌아 수원까지 왔는데, 권희가 사람을 보내 재촉하여 한강에 당도하였다. 권희가 친히 가서 맞이하여 종일토록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공에게 말을 한 뒤에야, 공이 강을 건너 성안으로 들어와 대궐에 이르렀다. 태조가 손님 맞는 예로 편전(便殿)에서 대접하고, 팔도의 경치를 그린 병풍을 손을 들어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나를 위해 이 누(樓)와 저 정자에 기(記)를 지어서 나라의 명승지를 자랑하게 하라." 하니, 공이 물러나와 지어 올렸다. 태조가 곧 지제교(知製敎)로 제수하니, 공이 어쩔 수 없이 명을 받고 왔다. 충주로 돌아가는 날에 상소를 올려 고려의 충신 정몽주에게 표창하고 증직(贈職)을 내려 절의를 숭상하기를 청하였더니,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논박하여 아뢰기를, "난신(亂臣)이 어찌 충신이 될 수 있습니까. 권근의 상소는 망언입니다." 하였으나, 태조가 여러 사람의 논박을 물리치고 그 말을 좇았다. 《축수편(逐睡篇)》
○ 당시의 선비들이 평소에 공을 종주(宗主)로 여겼었는데, 그때 이후로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군자가 몸을 세우는데 한번 잘못하면 만사가 글러진다." 하였으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축수편》
○ 운곡(耘谷)원천석(元天錫)이 양촌의 일을 논한 절구 한 수가 있었는데, 그의 후손이 원천석의 저서를 불태울 때에 첫 구절은 없어지고, 나머지 세 구절에 말하기를, "왕망을 찬송한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었네. 머리 털이 흰 양촌이 의리를 말하니, 세상의 어느 시절인들 어진 이가 나지 않겠는가." 하였다. 구절마다 공의 죄악을 주석으로 달아 기록하였다. 《축수편》
○ 신광한(申光漢)의 집에 공의 초상이 있었는데, 김안국(金安國)은 절을 하면서, "이 분이 우리 도(道)에 공이 있다." 하였고, 송인수(宋麟壽)는 절을 하지 않고, "이 사람은 절개를 못 지킨 사람이다." 하였다. 《해동문헌록(海東文獻錄)》
(..... 중략)
ARG written by. 월드플레이
'학술.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죽헌 성삼문(成三問) (0) 2020.10.24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0) 2020.10.24